[의령여행] 곽재우 생가,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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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여행/곽재우생가 ♬


경남 의령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삼성의 창업주였던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국내 굴지의 기업가들과 독립운동가였던 백산 안희제 선생 등 이름을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을 꼽으라 하면 많은 분들이 주저없이 임진왜란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곽재우 장군을 거론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항상 붉은 갑옷을 걸쳐 홍의장군이라 불리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무수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죠.

오늘 저희는 곽재우 장군의 혼과 얼이 서려있는 그의 생가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그럼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를 소개합니다.


* 여행일자: 2014년 5월 2일 (금)









곽재우 생가 주차장에 도착하여 생가의 모습을 담아봤습니다.

울창한 녹음에 둘러싸여 자리잡고 있는 곽재우 생가는 아주 운치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는데요.

이 생가는 2005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가의 입구에 있는 나무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데요.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안내판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라고 적혀 있는데요.

수령이 600년 정도 된 나무로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의령 세간리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거대하고 웅장해 보이는 은행나무입니다.







은행나무의 매력에 빠져 한참을 바라보다 곽재우 생가로 발길을 돌립니다.

곽재우 장군의 활약상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지라 그의 무용담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장 활약상이 높았던 인물이었다는 정도까지만......

그럼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대문을 통과하니 가장 먼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랑채 끝에는 어김없이 작은 누각이 만들어져 있는데 저기에 앉아 있으면 너무 시원할 것 같습니다.

비록 복원된지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한옥이 주는 매력은 항상 아름답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네요.







길다라니 자리잡은 큰문간채도 보이구요.

사랑채와 큰문간채 사이로 별당채도 보입니다.

항상 한옥을 둘러볼때면 드는 기분이 마치 제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조선시대로 돌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항상 한옥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사랑채에 딸린 누각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마냥 행복해집니다.

드러누워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히 들구요.









누각에 걸터앉아 마당을 바라봅니다.

생각보다 넓은 마당의 곱게 깔린 잔디와 운치로 가득찬 낮은 담장 그리고 담장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마치 제가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내는 듯 합니다.

이런 완벽한 조화가 방문객의 가슴에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구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여기에 계속 머무르면서 온갖 세상시름을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제 사랑채에서 안채로 넘어가면서 바라 본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다시 봐도 참 멋지다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간채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사랑채가 있었다면 또 다른 한쪽에는 안채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왼쪽의 건물은 창고입니다.

그리고 사랑채의 마당보다도 더 넓은 마당이 보이는데요.

아주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입니다.







특이한 것이 아까 본 큰문간채는 사랑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 보시는 중문간채는 안채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리고 중문간채 옆에는 또 하나의 창고랍니다.

그러면 곽재우 생가에는 창고가 2개가 되는군요.







각도를 달리하여 중문간채와 창고를 담아 봤습니다.

이렇게 곽재우 생가는 중문간채가 사랑채와 안채의 담 역활까지 하고 있답니다.







이 건물이 또 하나의 창고입니다.

그런데 문득 왜 창고가 두 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는데요.

제 개인 생각으로는 곽재우 장군의 나눔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지 않을까 합니다.

곽재우 장군은 어릴적부터 유복하게 자랐다고 하죠.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로 전 재산을 털어 의병으로 나섭니다.

그는 몸소 사회지도층이 해야 할 책임과 역활을 몸소 보여준 진정한 의인이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보시는 건물이 아녀자들이 기거하며 생활했던 안채입니다.

멋드러진 한옥의 풍취를 잘 느낄수가 있었는데요.

언제봐도 아름다운 한옥입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생가를 병풍치듯 두른 야트막한 야산의 푸른색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 곽재우 장군은 자연스럽게 호연지기를 익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한옥에서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장독대죠.

장독대 하나만으로도 한옥의 아름다운 운치를 모두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독대 옆으로는 우물이 보입니다.

구례의 운조루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장독대 바로 옆의 나무 한그루는 왜 이리 멋져 보이는지요.









여기는 별당채입니다.

아까 대문입구에서 보았던 사랑채 뒷편으로 보였던 별당입니다.

아주 소박하고 간결해 보입니다.






이렇게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를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세간리의 은행나무와 함께 카메라에 담아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몸소 실천했던 곽재우 장군의 그 정신을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층들이 조금이나마 배우고 본받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삼 곽재우 장군의 정신이 너무나 위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오늘 곽재우 장군이 나고 자란 이곳에서 그의 숭고한 정신을 많이 느끼면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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